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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수종양 재활일지

[재활일지] 우연과 운명

스물일곱청년 2020. 10. 4. 15:47

우리 엄마는 나를 낳기 전 태몽을 꾸었다. 꿈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곧 태어날 나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고 한다. 지혜롭고 남자다운 씩씩한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나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내가 들은 태몽이었다.

 

하지만 어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말이라 엄마는 부산으로 내려가 볼일도 보고 치과 예약이 잡혀 아빠가 대신 왔다. 우연히 아빠와 얘기 도중 나의 태몽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 '너는 엄마의 태몽에선 어떤 할아버지가 아주 용감하고 똑똑한 남자가 태어날 것이니 잘 키워서 꼭 대성해라, 근데 한쪽 다리를 절고 있구나. 그 아이가 바르게 잘 자라도록 부모로서 책임을 다 해라'라는 말을 했다.

 

참 웃기지 않은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믿지 못했다. 운명이라는 건 개척할 수 있는 일이며 후천적인 영향으로 인해 충분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 나였다. 그런데 무엇인가가 톱니바퀴가 서로 부드럽게 잘 맞물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정교하고 자연스러워서 어느 한쪽도 쉽게 건들면 안 되는 그런 기분이었다.

 

꼬리뼈 쪽에 생긴 욕창(마비 환자가 흔히 생기는 피부가 벗겨져 생기는 염증) 때문에 이 곳 양산부산대학교 병원을 찾았다. 최근 들어 상처가 거의 다 아물었기 때문에 간단한 치료로 끝날 줄만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진단명은 골수염. 피부조직 안에 세균이 침투하여 뼈와 살을 갉아먹고 염증이 생기는 질환이다. 그래서 2-3주간 향생제를 투약받고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 또 한 번 좌절을 겪었다.

 


나는 딱히 종교가 없다. 그래서 누굴 믿어본 적도 없고 나 자신 이외에는 다른 사람을 잘 믿지 못했다. 그런데 이처럼 좌절의 연속을 겪고 나니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졌다. 그렇다고 친구나 가족이 아닌 나 스스로를 다그쳐주고 희망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다.

 

어디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준다.' 내가 지금껏 아등바등 재활을 하면서 버텨왔던 게 견딜 수 있을 정도의 고통이 아니였을까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살아가야 할 운명인 걸까, 가장 찬란하고 빛이 나는 나이에 뜻하지 않은 고통으로 내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신이 밉다.

 

곧 있음 다가오는 수술로 인해 심경이 꽤 복잡해졌다. 아마 글을 쓰지 않았던 이유도 이런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변명일지도 모르지만 심리학 공부도 하고 있고 장시간 오랫동안 앉아있으면 또 다른 욕창이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황급히 노트북을 닫았다.

 

그래도 항상 나쁜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최근엔 보조기를 차고 보행기를 이용해서 한걸음 한 걸음씩 혼자 걷는 연습을 하고 있다. 감각이나 신경은 없지만 반복적인 자극이 혹시나 남아있는 다른 신경부위에 도움이 될까 하고 걷고 있다. 약 1시간 정도 걷다 쉬다를 반복하면 내 몸은 땀에 흠뻑 젖어있고 모든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걸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의의를 둔다.


지난 1년간 흘렸던 땀과 노력의 작은 결실

좌절은 하기 싫다. 눈을 뜨면 반복되는 일상이긴 하지만 아주 조금씩이라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전 프로야구 선수 박철순(OB 베어스 시절)씨도 한창 전성기였을 때 무리한 운동으로 인한 허리디스크 파열로 수술 후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했던 말이 가장 인상이 깊었다. 그는 2년간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퇴원을 할 때 의사가 영구장애 판정을 내렸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뭔데 내가 못 걷는다는 말을 단정해. 걷고 못 걷고는 내가 판단해' 

 

그 말을 듣는 순간 감탄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보다 강한 마음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삶이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라도 내가 가야 할 길을 알고 나를 믿고 따라간다면 못할 것도 없겠구나 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곧 있으면 병원에서의 1년이 다가온다. 목표한 만큼의 속도는 아니지만 작은 희망을 보았고 우연과 운명은 개척해나가는 것임을 깨달았다. 정해진 삶과 방향대로만 간다면 그냥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 줏대 없고 남의 감정에 휘둘리는 꼭두각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그렇게 나는 두려워하지 말고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하기로 오늘도 마음을 굳게 다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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